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드럼 요새 (문단 편집) === 파괴되는 요새들 === 4월 11일, 일본군은 바탄 반도 끝에 75~240mm에 이르는 각종 화포 110문을 방열하고 만내의 요새들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 1월 이후 나타나지 않았던 항공기들마저 출현하여 일본 육군 폭격기들이 매회 평균 50대씩, 며칠마다 한 차례씩 폭격을 했다. 게다가 지상과 공중에서 정확한 포격 관측까지 수반해서 정확한 명중탄이 날아오는 바람에 요새들의 피해는 점점 늘어났다. 요새에서도 대공사격을 했으나 대구경 대공포는 초반에 박살난 상태고, 그 이후의 대공화기 주력이라고 볼 수 있는 M2 중기관총의 12.7mm 기관총탄으로는 항공기의 폭격 방해도 제대로 못할 수준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지상 포대를 노리고 요새들이 역시 간간히 포격을 가하긴 했으나 여전히 관측 수단이 제한된데다 나날이 피해가 심해져서 반격은 이미 산발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4월 29일은 [[쇼와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이었다. 이 날까지 필리핀을 완전히 점령하라는 상부의 압력을 염두에 두고 일본군은 더욱 더 막대한 포격을 가해왔고, 특히나 성가신 드럼 요새의 [[포탑]]들을 박살내기 위해 [[글라이더]]에 폭탄을 매달아 직접 요새에 돌진시키는 [[카미카제]] 전법도 감행했다. 일단 사람이 탑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종했는지 글라이더는 요새 측면의 우현 부포 포곽에 명중해서 포곽을 통째로 날려버렸으나 다행히 부포의 탄약은 인화하지 않아 그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그 후로도 나흘 동안 일본군은 쉬지 않고 포격을 계속했고 마침내 5월 2일에는 코레히도르 섬의 마지막 탄약고가 직격탄을 맞았다. 그 순간 10톤이 넘는 요새포의 포신이 하늘을 날 정도로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식의 포격에서는 구시대 요새적 발상인 포대와 엄폐호 구성의 요새는 제대로 버틸 수가 없으므로 결국 장갑덮개가 없는 포대들은 차례차례 파괴되어 5월 5일에는 드럼 요새의 14인치 포탑과 코레히도르의 12인치 [[구포]] 1문, [[155mm 견인곡사포]] 수 문을 제외한 전 화력이 완전히 정지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말해 드럼 요새 빼고는 중화기가 완전히 없어진 셈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날 밤, 일본군이 일제히 코레히도르 섬에 상륙했을 때 제대로된 방어를 하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덕분에 일본군은 4시간이 되기도 전에 해안선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고 사령부로 접근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2년 5월 7일, 이미 어뢰정 편으로 야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한 맥아더 장군을 대신하여 연합군 측의 총지휘관인 미 육군중장 웨인라이트 장군이 필리핀 전역의 연합군에게 항복 명령을 내림으로써 6개월에 걸친 마닐라 만 공방전은 끝을 맺고 말았다. || [[파일:attachment/Fort_drum_2009_14inch_mw.jpg|width=100%]] || || 파괴된 드럼 요새의 주포탑 || 하지만 웨인라이트 장군이 항복 메시지를 방송할 때까지, 드럼 요새는 마닐라 만에 남은 최후의 화력으로써 여전히 포격을 지속하였으며, 항복 방송이 들리자 주둔군은 주포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도록 파괴한 후 항복했다. 여기에 더해서 부포나 개인화기도 재사용이 불가능하도록 파괴하고, 탄약에는 바닷물을 부어버리는 등 최대한 파손했다. 결국 '''일본군은 최후까지 드럼 요새를 파괴하지 못했다.''' 그리고 교전 시작부터 항복할 때까지 드럼 요새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부상자 5명뿐이었는데, 이 중 병원에 입원해야 할 만큼 부상을 입은 자는 단 1명에 불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